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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주변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있거나, 살아있지만 다시 만나지 못하는 관계를 갖고 있다. 혹은 아직은 아니더라도 이러한 관계들을 경험할 예정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상일지라도 영화나 소설, 만화 속 인물들의 죽음과 슬픔에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다. 또는 굳이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스스로가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존재가 본인에게 소중한 존재라면, 그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누군가의 부재란 것은 그만큼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순식 간에 무뎌 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미키 사토시 감독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2006)』라는 영화 속, ‘어쩌면 이별이란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고 난 후에 다른 한 사람이 아 그게 마지막이었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독백에 꽤나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아 그게 마지막이었구나하고 그의 부재를 떠올리는 것은 꽤나 간단해서 공허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습게도 사람은 부재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면, 내가 편하고자 잊어버렸나 싶은 스스로의 이기심에 또 다시 곧 괴로워진다. 결국 인간은 부재에 무감각해짐과 괴로워짐을 반복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썸머 작가의 『HAPPY BIRTHDAY』는 이산호의 죽음 이후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산호를 잊은 척도 해보고, 잊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기도 하며 어떻게든 살아가 보려고 한다. 각 인물들의 불안정하고 모순적인 감정은 인간다움그 자체를 보여준다. 누군가의 부재를 견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섬세하고 담담한 문체를 통해 풀어지면서, HAPPY BIRTHDAY』는 피폐물구원물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공존하는 흥미로운 작품이 된다.

 

선우와 산호의 이야기

  피폐물이라는 작품 키워드는 등장인물이 계략, 감금, 강간 등의 여러 폭력적 상황에 놓여서 정신이 피폐해질 정도로 고통을 받는 장르로, 보는 독자에게도 마이너스 감정을 주는 작품을 일컫는다. 썸머 작가는 피폐물에 등장할 것 같은, 고통에 절어 삶에 무관심하고 달관한 태도를 보이는 캐릭터를 본인의 작품 내에 자주 등장시킨다. HAPPY BIRTHDAY』의 김선우도 그런 경우다.

  선우는 고등학교 시절 김승배 패거리에게 심한 학교폭력을 당했으며 김병신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자주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폭력에 익숙해져 갔다. 그래서 김승배가 학교 모두에게 자신을 김병신이라고 부르라고 한 것에도 그러려니 한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심한 욕으로 부르고, 누구 하나 그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심지어 김병신인 선우는 작중에서 인간 형태도 아닌 덩어리로 그려진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물어본 사람이산호. 산호의 존재는 모든 것에 무덤덤하던 선우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제까지 목소리도 제대로 내본 적 없는 선우는 산호에게는 많은 것을 먼저 물어보고, 산호의 연인 이지호에게 질투를 느껴 괜히 시비를 걸기도 한다. 산호가 선우에게 이름을 물어본 것이 동정인지 변덕인지는 모른다. 그저 이제는 흔한 문구가 되어버린 시어처럼, 산호가 선우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김병신이었던 선우를 김선우가 될 수 있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마치 구원물특유의 왕자 캐릭터처럼 보였던 산호는 김승배에게 살해 당한다. 선우의 이야기에는 희망이 없다.

  등장인물을 포함하여 독자에게까지 피 말리는 절망감을 주는 피폐물의 가장 큰 요소는 희망과 구원 따위 없음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평범했던 인물이, 절망에 노출될수록 점점 정신이 불안정해지고, 결국은 삶에 달관하거나 자살을 선택하는 등 비극적 결말로 끝이 난다. 산호 소식을 접한 선우는 일주일을 앓아 누웠다가 정신을 차리자 마자 김승배를 쫓아가 죽인다. 선우는 자신이 김승배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잔인하게 김승배를 살해하는 데에 성공한 선우가 감옥에 가고, 이야기는 정석대로의 피폐물 루트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선우의 출소 이후의 이야기부터는 여느 피폐물과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인다.

 

선우와 지호의 이야기

  지호는 산호가 죽은 뒤, 언젠가 그와 함께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산호는 죽음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아예 없었던 것이 되어버리면 슬프기 때문에 자식을 남겨서 존재를 기억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때의 지호는 세상엔 죽은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들을 기억해야 할 후손들이 불쌍하다며, 죽으면 그냥 잊혀지는 것이 도리라고 가볍게 대답했었다. 그러나 막상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자 지호는 산호를 잊지 못하고 힘들어한다. 산호가 없는 인생을 갑자기 맞이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고,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에 드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산호가 남기고 간 것을 생각하지만 산호에겐 자식이 없고, 산호를 죽인 김승배조차 세상에 없다. 그래서 지호는, 김병신에게 관심조차 없었던 과거가 무색하리 만큼 김선우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선우의 출소 이후, 지호는 계속해서 선우를 찾아간다. 그런 지호에게 선우는 그만 찾아오라고 하지만, 지호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선우를 만나러 간다. 만남이 이어지던 중, 지호는 때때로 선우에게서 산호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지호가 선우를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산호를 잊지 못해 선우를 통해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지호 본인은 나는 자각이 빠른 편이다라며 자신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듯 말을 건네지만, 둘의 관계에서 좋아해라는 흔한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저 지호에겐 선우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호를 선우도 밀어내지 않는다. 선우는 산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으나 이제는 전달할 수 없는 말들을 지호에게 한다. 지호가 산호 이후로 아무와도 교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그럼 너랑 키스하면 산호랑 간접이네.’라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둘의 관계는 서로를 이용하는, 남들이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다. 지호와 선우는 불안정하고 비이성적으로 보인다. 둘 다 정상적인 관계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비틀린 집착을 한다. 이는 마치 피폐물에 나타나는, 서로에게 광적인 집착을 하는 캐릭터의 모습 같다. 그러나 정석적인 피폐물에서 보이는 마이너스적 관계성이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관계가 모여 플러스적 면이 된다는 것이 구원물의 관계 서사를 따른다. 다만 『HAPPY BIRTHDAY』가 정석적인 피폐물을 벗어나는 것처럼, 주인공이 받은 아픔을 구원적 존재가 보듬어주어 건강한 관계로 나아가는 아름다운 구원물이 되지도 않는다.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가 필요한 것이고 어찌 보면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서로를 통해 괜찮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 사이의 상처는 사람을 통해 치유된다는 진부한 이야기가 사실인 것처럼 부재는 새로운 것으로 채우고, 둘은 서로의 존재를 버팀으로 삼아 겨우살아갈 수 있게 된다.

 

선우와 수정의 이야기

  그렇다면 『HAPPY BIRTHDAY』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여기에는 산호의 누나 이수정의 존재가 큰 역할을 한다. 수정은 산호와 매우 닮았다. 생긴 게 닮은 것도 있지만 어쩐지 행동마저 닮았는지, 우연히 마주친 선우의 동창이 그를김병신이라 부르는 것에 크게 화를 낸다. 그리고 지호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고는 더 크게 화를 낸다. 지호는 이 사건을 통해 그 옛날 무심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며 선우에게 김병신이라 했던 것을 처음으로 사과한다. 그리고 선우는 수정의 모습에서, 그리고 지호에게 사과를 받으면서 산호를 떠올린다.

산호야! 나 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너는 내게 너무 눈부신 사람이야.

내가 먼지라면 너는 중력이야.

나는 형태없이 부유하고 너는 내가 만난 최초의 인력이야.

  선우는 계속해서 지호에게 산호를 잊어간다고 하고 스스로는 산호를 떠올리는 게 괴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정에게는 김승배를 죽인 것이 산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었다. 그러나 사실 선우는 자신이 산호와 큰 접점이 없는, 오로지 짝사랑이었던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산호와 관련된 것들을 애써 무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계속 무시하기엔 산호가 너무나도 큰 존재였다. 산호는 계속해서 선우 주변을 맴도는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해주는 수정의 행동을 통해 다가와, 또 다시 선우의 세계에 영향을 준다. 지호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너를 못 본 척하지 않을 거라고 한 말에는 별 감흥 없었으면서, 이번 지호의 사과에 선우는 펑펑 운다. 그리고 지호에게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그의 감정을 다독이는 말까지 건네 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수정은 선우에게도 좋은 일이 아주 많이 생길 것이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해준다. 선우와 지호, 그리고 수정 모두가 서로 얽혀 있는 감정의 타래를 풀어낸다. 이들이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선택한 것은 서로를 통해 산호의 죽음이란 부채를 덜어주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산호로 연결된 이 관계들은 마지막까지도 산호를 벗어나지 못한 해괴한 관계성이지만 너무나 당연하다. 전개가 덤덤하다고 해서 인간의 감정마저 덤덤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여느 아름다운 이야기들 속 주인공들처럼 오로지 치유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서 계속 산호를 보고 자신의 죄책감을 마주하고 살아갈 불안정한 관계는, 가장 인간다움과 맞닿아 있다.

 

  피폐물과 구원물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의 정신적 취약함이 매체에 반영된 것이다. 피폐물을 통해서는, 남의 불행을 보고 대리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정신적 고통을 통해 자극에 익숙해져 현실 도피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극에 익숙해져야 하는 현실에 부딪히고 있을 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극에 상응하는 만큼의 위로다. 이에 아무 조건 없이 완벽한 틀처럼 서로를 갈망하고 위로하는 구원물을 원하게 된다. 누군가는 피폐물만, 누군가는 구원물만, 혹은 둘을 번갈아 보며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정석적으로 피폐물과 구원물이라는 키워드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들의 어떠한 기대심리를 충족시키는 장르적인 경향성을 띠고 있다. 둘 다 힘든 현실에 대피처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피폐물과 구원물의 감정 해소 방식 자체는 상처와 재생’, ‘죽음과 생과 같이 대척점에 있다. 그러나 『HAPPY BIRTHDAY』는 산호라는 캐릭터의 공백이 채움을 불러일으켜 두 키워드의 혼종적인 구조를 만들어낸다. 재생과 생이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그 채움 또한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썸머 작가의 『HAPPY BIRTHDAY』는 피폐적인 구원물’, ‘구원적인 피폐물’, 그 어떠한 틀에도 맞지 않는 새로운 키워드가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잃은 모든 이들에게,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흔히들 인간은 불완전하다고 말한다. 그런 불완전 존재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멀쩡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무뎌 질 뿐이다.

 

  에필로그에서 지호와 선우는 산호의 성묘를 간다. 지호는 우리는 잘 지낸다고 말하고 속으로는 아니, 죽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이 서로를 지탱하며 자리를 일어나는 장면에서는 아니 괜찮다고 한다. 그들은 전혀 괜찮지 않지만 서로가 있기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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